Howdy I'm Woody
Sung Woo Kim(Woody)
2020.01.17 - 2020.02.14
기억은 유리 표면과 같다. 그것은 시간의 투영이며 이미지의 기록이다. 유리 표면에 비친 이미지 중 실재와 동일한 이미지란 없다. 유리가 그러하듯 기억 또한 쉽게 깨어진다. 편린이란 말 그대로 한 조각의 비늘에 불과하고, 생의 시간을 기록한 건 이중으로 왜곡된 기억의 편린들이다. 나는 온전한 기록을 가져보지 못했으나 이를 슬퍼하거나 가짐을 소망하지 않는다. 메두사는 거울 앞에서 차가운 돌이 되었다.
가능한 한 커다란 샹들리에를 가지고 싶었다. 금빛 촛대 아래로 반짝이는 유리알들, 빛의 반영이 모여 이뤄낸 하나의 질서. 그것은 형태를 갖췄으나 끊임없이 흔들리는 개체들을 겨우 다독이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취약한 질서 앞에서 어떤 부서져 내림을 상상한다. 통합된 빛의 곡선들이 셀 수 없는 반짝임으로 흩어지는 장면을, 하나의 불완전한 세계에서 저마다의 불완전한 세계로, 로고스에서 파토스로.
반짝임을 동경했다. 그럴 수 있음을 숭앙했다. 스스로 발광하지 않음에야 빛나는 모든 것은 빛의 반영이다. 오직 유리처럼 매끄러운 표면만이 빛의 반영을 허락한다. 그 유려함의 의미는 피상적 유혹, 세속의 가치, 그리고 가벼움으로 격하된 채 통용된다. 그러나 그 가벼움이야말로 어쩌면 생의 또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비록 섬약하지만 제 존재의 발현이며 광원으로의 안내자다.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건 아주 작은 반짝임이었다.
존재한다는 건 남겨짐이다. 남겨짐으로써만 존재는 기억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그것이 기록된 방식을 빌어 기억한다. 그렇다면 존재의 존재를 결정하는 건 기록이다. 기록이 없는 존재란 한 번도 반짝여본 적이 없는 무無다. 이를 자각한다면 기록은 존재를 생성하고 보전하고 그것에 영생을 부여하는 권능의 신이다. 빛의 광원이다. 이 점이 내가 역사와 신화를 기록한 고전 회화를 질료로 사용하는 이유다. 나는 종종 고전에 기록된 역사, 혹은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는 이미지의 일부를 변경한다. 현대적 이미지와 과거적 이미지들을 한데 뒤섞어 서사를 엮어내길 즐긴다. 기록된 사실에 대한 반박성 도발은 아니다. 그저 이를 통해 기록의 본질과 기록된 주체, 즉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려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미지로 세계를 기억하고, 그런 의미에서 앤디 워홀은 옳았다.
존재, 그것은 빛과 환희의 장막으로 보호받는 명명된 무엇이리라. 그러나 영원한 존재라는 게 있을까? 근원적 슬픔이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모든 빛은 서서히 광휘를 잃어간다는 사실, 어떤 반짝임도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 그렇게 존재는 소멸한다는 사실. 존재의 시간이란 결국 소멸로의 과정이다. 그리고 소멸은 그저 존재의 빈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적막이며 온전한 고요다. 비어 있음으로 존재의 부재를 증명하는, 역설적으로 존재의 존재를 증명하는 그런 빈자리가 아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 순수한 무無다. 그렇기에 나는 소멸이 두렵다. 소멸 자체가 슬픈 게 아니라 결국 빛을 잃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슬프다. 감정은 소멸의 도정에 스민다.
꽤 오랜 시간 존재에 대해 생각해 왔다. 그럼에도 나는 내 생각들에 적확한 주석을 달 수 없다. 아마 내 조악한 작품들이 사유라는 거창한 단어에는 어울리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여전히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어 무가치한 생각들을 늘어놓고 있고, 그래서 가끔은 고개를 들 수 없이 면구하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하는 점이 있다면 내 하찮은 몽상들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짓’이다. 박스에 머리 묻고 세계를 고민하는 ‘짓’, 실용적 가치가 배제된 고민의 무용성을 외면하는 ‘짓’, 그런 짓들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림이었다. 초기 현대미술은 전통회화에 ‘관상용’이라는 타이틀을 선사했다. 예술이 ‘데코레이션’이 되어선 안된다고 선언했다. 과거의 신화는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경멸했고 조롱했다. 그러나 벽에 걸어놓고 감상할 수 있다는 점, 바로 그 점이 내게는 현실과 괴리된 나의 몽상들이 다시 현실의 공기와 맞닿을 수 있는 접점이라고 보았다. 벽지 대용이면 어떠하리. 생의 반짝임 곁에서 작은 즐거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본질을 잃지 않을 것. 너무 과대포장하지 않을 것.
스러져가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낡음을, 시간의 흔적을, 소멸로의 여정을 사랑한다. 꺼져가는 빛의 흔들림과 슬픔이 깃든 눈을, 그리고 생의 어떤 본질을 받아들인 고요한 침묵을 연모한다. 오래 묵을수록 깊어진다고 했던가. 왜 끝에 다다를수록 아름다운 건지. 나는 한 번도 초를 끝까지 태우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