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athing in Grace
Sanji Gallery x Chosun PUB present < Trésor Caché Project >
Albert Kyu-Hyun Choi
2022.01.24 - 2022.02.13
나는 늘 나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는 순간들을 기다린다. 언제 어디서든 그 순간들을 만나면 난 그것을 담아두려고 그림을 그렸다. 연필, 펜, 수채화, 유화가 순간에서 영원을 포착하는 내 도구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패드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그저 노트를 하기 위해 구입했는데, 사용하다 보니 디지털만의 순수한 표현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디지털이라서 내가 담아내고 싶은 어떤 순간을 보다 빠르게 그릴 수 있다. 또 내가 본 장면의 색까지 그대로 베끼고 싶은데, 전통적인 기법은 제약이 많고 오래 걸린다. 반면 아이패드는 색을 만들고 칠하는 과정을 단시간으로 줄여준다. 작업과정이 빨라져서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기 전에 오롯이 그림으로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이 전통적인 기법보다 더 순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력이 넘치는 그림, 디지털만의 고유한 표현력, 색에 대한 정직한 탐구, 이러한 열망을 담아내고자 한 것이 나의 프린트들이다.
일층에 전시된 유화 세 점은 내러티브(Narrative)의 표현에 대한 나의 해결책들이다. 나는 작가로서 나의 모든 것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싶은 동시에 나의 주관들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 모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재현(Representation)과 표현(Expression)이 서로 타협하는 것이다. 사물이나 경치를 그릴 때는 이러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주제가 나에게 주어졌기에 만족시켜야 할 재현의 조건들도 이미 결정된 셈이다. 나의 주관이 많이 들어갈 일이 없다. 그런데 사물이나 경치는 내가 하고 싶은 표현을 다 해주진 않는다. 표현을 갈망하는 나의 욕망이 분출된 것이 세 점의 유화다. 프린트와 유화를 통해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은 같다.... 생명력!
한국에 돌아온 후, 지난 3년간 열심히 작업했던 디지털 아트 중 일부를 동판지에 옮겨 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이태리 풍경 10점, LA 풍경 3점, 창문 시리즈 4점, 그리고 정물화 5점을 이번 전시회를 위해 선택했다.
이태리 풍경 10점은 밀라노에서 파도바로, 파도바에서 밀라노로 가는 왕복열차 안에서 그린 풍경화 시리즈로 전체 20점 중 절반이다. 기차 안에서 내다 본 창문 밖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 찰나, 그 지나가는 풍경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만의 규칙을 정했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타나면 그 순간을 1분만 보고 분석하고 다음 10분에서 20분 동안 그것을 아이패드에다 그리는 것이다. 사물을 최대한 단순화시켰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고개는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또 새로운 풍경이 나도 그려달라고 유혹할 것이 뻔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림을 다 완성하고 고개를 들면 어김없이 또 다른 아름다운 장면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그때 바로 새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해서 두 시간이 넘는 여행길을 쉴 틈 없이 그림만 그렸고, 스무 점의 이태리 시리즈를 얻었다.
LA 풍경 3점은 그 땅에 대한 나의 인상을 잘 보여준다. 우선은 강렬한 햇빛과 시원한 하늘. LA의 토종 식물이 아닌 야자수! 토종이 아닌 줄 알면서도 LA 관련 풍경을 생각하면 야자수가 포함된다. 광활한 대지와 산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한동안 차를 타고 산으로 가서 구석 구석 그 지형을 살펴보았다. 또 LA에는 다양하고 화려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 다녔다. 밝은 햇빛을 받는 광활한 땅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과 야자수, 이게 LA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다.
창문 시리즈는 코로나가 시작되고 나서 만들기 시작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모든 수업이 줌으로 진행되자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많이 응시하였다. 커다란 창문이 내방에 없었더라면… 그건 상상하기도 싫다! 사실 창문 밖에 다른 집들이 가까이 붙어있어서 별로 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창문이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별 것 없다고 생각했던 풍경이 점점 더 내 마음 속에 풍요로운 풍경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그림들을 그려낼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현재까지 7 점)
정물화들은 감사한 마음을 담아낸 그림들이다. 일이 끝나고 늦게 집에 돌아오면 책상 앞에 앉아 멍을 때렸다. 지친 마음으로 내 인생을 한탄하다가 책상 위에 놓여진 탄산수에 레몬이 들어 있는 유리잔을 봤다. “아니, 탄산수에 레몬 두 슬라이스를 넣어서 마실 수 있는 사치가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한탄할 게 많은 거야?” 이 생각을 하자마자 감사함이 마음 속 깊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유리잔을 착실히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정물화들은 다 같은 맥락으로 내게 감사한 마음이 들게 만든 사물들을 그린 그림들 중 5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