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kimkeunjoong(金謹中). 꽃,이전(Before-Flower. 花,以前)17-7. 162x130cm. Acrylic, Oil on canvas. 2017
赤花靑山

김근중 개인전

2022.02.17 - 2022.03.17

  나는 존재에 대해 탐구한다. 삶 속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길을 찾는다. 눈 앞에 오고 가는 것들,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 나아가 그것을 바라보는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를 묻는다. 선악의 이분법의 세계에 갇혀 잃어버린 그들의 진정한 모습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분법에 갇혔기에 그것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벗어났다는 것은 무엇이며 벗어난 곳 또는 존재란 어떤 것인가? 나는 내 삶과 내 이분법을 버리고 다른 곳, 다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분법속에서 이분법에 구속당하지 않고 사는 길을 찾는 것이다. 이 자리가 꽃자리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신뢰한다. 희로애락이 벌어지고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인간의 진실한 삶의 현장이라는 말을 믿기에 나의 의식을 통찰하여 이분법 중 어느 한쪽만을 집착하지 않고 양쪽을 수용한 존재로서의 삶의 길을 자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우리의 고통은 선악의 이분법 중 어느 한쪽에 함몰되었기에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분법은 언어가 있으므로 시작된다. 장단, 고저, 냉온, 남녀, 노소 등의 이분법은 대상이나 존재를 상대 비교하여 언어로 구별하고 규정함으로써 의미를 전달하는 소통의 자유를 위해 생겨났다. 그런데 이것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둘 중 하나에만 고착되어 있기에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다. 즉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선이고 그 밖의 것은 악이라 보는 관점을 말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선이라는 실체가 있고 악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본래 선악이란 없다, 다만 선악이라는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소금은 그 자체가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러나 과용하거나 미흡하게 사용을 하면 악이 되고 적절하면 선이 되는 것처럼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다.

 

  서구철학에서 말하는 이성적 주체란 분열된 주체이다.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살던 상상계(the imaginary)에서 언어를 사용하여 사리 분별을 하는 성인이 되는 상징계(the symbolic)에 진입을 했지만 언어의 세계에 갇혔기에 분열됐다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났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선악의 이분법 중 어느 하나만을 옳다고 생각하는 관점을 내려놓고 쓰임에 따라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는 열린 관점을 갖을 때 주체는 분열을 벗어나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현실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도 적용이 된다.

사회적 문화적 규범이나 법규에 맞추는 것은 선으로 보고 그 밖의 것은 악으로 보는 의식으로 인해 우리들의 내면은 분열되어 있다. 사회나 문화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금기와 처벌이 두려워 억압 배제하여 은폐시켜 놓았다. 내 안의 타자라고 부르는 욕망, 감정, 생각들은 스스로가 열등하고 결핍되었다고 보기에 나가 아닌 남의 것 같이 낯설다. 그러나 그 역시 라깡의 말처럼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는 나’ 인 것이다. 그것들은 규범이나 법규에 얽매이지 않은 원초적인 야성 자체이기에 엄청난 무한한 가능성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나의 것으로 수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종교에서 참회와 회개처럼 예술에서야 말로 진정으로 필요하다. 그동안 타자의식으로 억압했던 의식들을 화면으로 드러내어 규범적인 것들과 조화를 이루어 낼 때 작품도 주체도 온전한 것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과 예술에 있어 ‘닫힌 사고’를 횡단하여 ‘열린 사고’를 갖는 것은 삶의 변혁을 가져오는 중대한 결단이 다.

 

작품에서의 흔적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갖가지 환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다. 어느 때는 있는 듯하다가 어느때는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것들은 어슴푸레한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고 전혀 알 수 없는 형상이나 기호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들을 나는 의식의 꽃으로 부른다. 이것들이 화면에 드러나는 순간이 존재자체의 화해이고 분열을 넘어 일체를 이루는 순화이다. 이로써 그들은 그로테스크하거나 기묘한 모습이 아닌 새로운 존재의 현현이 될 것이다.

bottom of page